자아의 익숙한 충돌, 그리고 파편화된 신체

   근대 이후 서양 철학 및 사회학의 주된 관심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그러한 주체의 구성에 있어 정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신체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역시 ‘관계’와 ‘신체’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여러 문제에 관해 고민하는 젊은 조각가 김남현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어휘 역시 ‘관계’와 ‘신체’다. 그러나 두 번째 개인전을 맞는 현재 시점에서 그의 작업 양상은 첫 번째 개인전과 비교해 외견 상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전 작업이 사회에 길들여진 개인의 신체를 도구나 장소를 매개로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쪽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사회 내 타자와 맺는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개인의 자아를 신체의 파편화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유사한 관심의 흐름과 조각이라는 전통적 매체가 크게 달라 보이는 작업들 사이를 꿰뚫고 있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을 살피기에 앞서 이전 작업들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할 것이다. 크게 <갇힌 자(Confined One)>와 <싱글(Single)>이라는 두 연작으로 진행되어 온 전작들은  사회의 보편적 관념이나 규율에 따라 익숙해진 개인의 신체 동작을 일종의 도구로 고정시킨다거나 그러한 관념과 규율이 작동하는 대표적인 장소들을 한 사람의 신체에 맞춰 개인화시킨 조각들이다. 처음 시작은 스스로 규율에 맞춰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똑바로 선 성인 남성의 키에 맞추어 시멘트와 철로 제작한 개인용 감옥이었다. 이후 같은 재료로 기도, 거수경례, 큰 절 등의 자세를 고정시키는 무거운 장치를 잇달아 만들었고, 여러 다른 재료로 양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자세를 유지시키거나 서로 손을 잡은 채 마주보고 있게 만드는, 이른바 여러 형태의 물리적 ‘감금장치’를 제작했다. 이러한 다양한 감금장치들은 강력한 규율이 작동하는 감옥, 군대, 학교와 같은 실질적인 제도에서부터 유교사상과 같은 비가시적인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우리 사회 내 위계질서와 고정관념에 따른 상징적인 동작들을 고정시키는 장치들이었다. 한편 이러한 도구적 장치들은 개인화된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군대막사, 침대와 목발로 재현된 병원, 목욕탕, 화장실, 교실, 트램폴린이나 볼풀 같은 놀이기구, 기와집 등이 앞서의 개인용 감옥과 같이 작가의 손을 거쳐 ‘일인용 공간’으로 재탄생한 공간들의 목록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신체의 형태지만 실제 신체 크기와 다르다거나 문이 달려있지만 열리지 않는 것처럼, 사용이 불가능한 상징적인 공간들이다. 이는 마치 사회의 규율과 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한 희망임을 시사하는 듯 하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자연스럽게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을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의 이 책은 서구 역사에서 감옥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떠한 원리로 작동해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근대 이후 권력에 의한 감시 체제와 그로 인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의 ‘유순한 신체’에 관해 상세히 기술한다. 18세기 이전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된 중범죄자의 공개처형이 더 이상 사람들을 위축시키거나 권력에 복종하게 만들기 보다는 공분을 일으키거나 민중을 폭동에까지 이르게 하자 합리적인 형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죄수들을 격리수용하는 형태의 감옥이 등장하게 되었다. 합리적인 형벌로 보였던 감옥은 죄수들에게 틀에 짜인 일과시간표에 맞춰 기계적으로 생활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감시를 내재화하도록 만들어 결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꺾고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감옥의 메커니즘이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사회 전반의 다양한 체제로 확대 적용됨으로써 근대 이후 국가는 통치가 용이해졌고, 사람들은 자각 없이 그러한 권력 체제에 자신의 신체를 맞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푸코는 이처럼 자발적으로 규율을 따르게 하는 ‘감시와 처벌’의 원리가 근대 이후 인간을 더욱 더 개인화시켰다고 지적한다. 김남현의 <Confined One>과 <Single> 연작은 이러한 푸코의 이론을 가볍고 재치 있게 조각으로 재현한다.

   이처럼 전작들이 권력 체제 안에서 길들여지고 개체화될 수밖에 없는 인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재현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중심을 이룰 <익숙한 충돌(familiar conflict)> 연작은 그렇게 개체화된 인간들이 사회 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 맺으면서 겪는 내면의 심리 변화나 자아의 충돌을 주제로 한 ‘표현적 조각’에 가깝다. 철골 구조에 스티로폼 및 우레탄폼으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레진(합성수지)을 두껍고 거칠게 발라 완성한 형상에 흰색과 검은색의 아크릴 물감을 불분명한 경계로 흘러내리듯 채색 한 이 조각들은 대부분 인간 신체를 파편화하여 기이하게 재조립한 모습으로 직접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익숙한 충돌’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절제된 ‘고독’이 있었다. 보다 계획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 <고독(Solitude)>이라는 제목의 인체조각에서 작가는 한 사람도 두 사람도 아닌 기이한 형상의 인체를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분명 몸은 하나인데 두 개의 머리가 얼굴을 맞댄 채, 무릎에 올려놓은 두 손은 다른 두 손과 깍지를 끼고 다른 두 다리가 엉덩이를 의자처럼 받치고 있는 이 인물조각은 실제 손을 석고로 뜨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뒤 작가 자신이 입던 옷을 입혀 놓아 그야말로 낯설고도 익숙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자아 외에 내면에서 대면하고 있는 본능적인 무의식과 긴장관계를 이루는 개인의 심리를 이처럼 ‘고독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내재적 본능과의 대면은 곧 레진을 이용한 보다 표현적인 기법으로 전환되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의 얼굴과 얼굴을 맞댄 채 성기를 잡고 서있는 사람의 몸이나, 머리가 분리되어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는 몸 등 기괴하지만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해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익숙한 충돌’로 확장되었다. 이는 쾌락의 원칙에 지배되는 원초적 무의식(id)과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죄의식이나 도덕관념 같은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인간의 자아(ego)에 관한 프로이드의 정신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작가는 이러한 개인의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단지 무의식과 초자아 사이의 충돌 뿐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양상으로 확장시켜 고민한다. 상체를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인물상에는 이목구비가 없는 새까만 얼굴이 여러 개 달려 있고, 기괴하게 변형된 가느다란 몸에 수직으로 머리가 세 개 달린 한 인물상은 양 손으로 두 얼굴의 입을 각각 하나씩 틀어막고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영향 관계 아래 한 개인에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복합적인 자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온전히 그 사람의 것으로 체화되지 못한 여러 자아들 간의 충돌로 갈등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이중자아’와 같은 정신분석학의 병리적 현상이 아니고서도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그야말로 ‘익숙한 충돌’이다. 우리 모두는 사회 내 여러 집단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고 그 역할들은 때로 상충하기에 한 개인이 하나의 통일된 자아를 유지하기 힘들거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지배되어 잠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합적 자아를 표현한 작가의 인물상은 급기야 수 십 개의 머리가 쌓인 탑 위에 한 사람이 양팔을 벌려 자신의 머리 양 옆으로 여러 개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기형적 모습의 조각상에서 극대화된다. 작가 스스로 ‘수집된 자아’라 칭한 이 인물상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중심을 잃고 획일화된 모습의 유사한 여러 자아를 모아놓은 것 같은 몰개성한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시도한 평면작업 <공공의 얼굴(Public Face)> 역시 전혀 다른 매체와 형식이지만 이와 유사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얼굴을 세 가지 색 물감으로 종이에 그린 후 겹쳐서 작게 찢은 후 그 조각들을 섞어 다시 다른 세 사람의 얼굴로 재조합한 이 삼면화(triptych)는 애초에는 분명 다른 얼굴이었음에도 한 데 섞어 다시 나누면 결국 유사하지만 온전치 않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별 비판 없이 자아를 형성해 감에 있어 결국 개별적인 특성은 사라지고 획일화된 집단 구성원 중 하나가 되는 사회의 모순적 현실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한 개인 안에 여러 자아를 품은 인물상들과 유사한 맥락에 위치하는 동시에, 결국 작가의 초기 작업들과도 연결된다. 특정한 자세를 고정하는 감금장치와 특정한 목적으로 한 사람에게 제한된 개인용 공간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 안에 관계들 속에서 파생된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그로 인해 고립될 수밖에 없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작에서 고립이 개인의 신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일어났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는 개인의 정신적 자아의 고립과 갈등이 신체로 치환되어 제시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는 신체와 정신, 즉 몸과 마음이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한 개인의 결합된 두 측면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 작가는 신체와 정신이 결합된 각각의 개인이 원자처럼 개체화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적인 통찰과 면밀한 기획을 가장 육체적인 조형언어인 조각으로 풀어내는 역설을 가지고 말이다.

                                                                                                                                    신혜영 |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