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피륙과 고통의 기술

유사피륙과 고통의 기술

남웅(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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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으로부터 탈구하거나 탈구한 것들을 발굴하는 작업, 감각하지 못하고 호명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공정과 그 결과물들은 예술적 재현의 자장에 있다. 설령 감각하지 못한 것을 감각하는 시도가 논리상 불가능한 명제일지라도 작가는 관성을 거슬러 비평적 재현을 시도한다. 하여 예술가는 예민함의 주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형상화하는 주체로 일컬어진다. 그것이 낭만주의 사조로부터 오늘까지 전해오는 예술가 모델일 것이다.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단절과 고독, 고립 역시 오랜 예술의 소재였다. 그는 소외되었지만, 소외된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그렇게 예술가는 관계에 대한 예민함과 집단에 대한 불편함, 나를 침범하는 타인의 시선과 개입에 대해 고통을 호소하고 조망하는 자로 설명되어왔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절반의 기술일지 모른다. 작가로서 작업을 알리고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아닐지라도, 작품은 관객과의 스킨십을 통해 제 의미를 인정받고 적어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은 동시대 의미에 호응하고 연결된다. 아무리 작품의 관성을 깨고 파괴적 작품을 지향하더라도 작품은 관계로부터 무관하지 않으며 적어도 관계 속에서 적대와 불화를 구축한다. ‘저자의 죽음’부터 ‘관계미학’까지의 궤적을 살피지 않더라도, 작가가 온전히 완결된 주체가 아님을 거부할 수 있는 이는 없을 터, 특히 시각예술에 있어 고립과 단절의 키워드는 역설을 품는다. 시각예술 특성상 작업은 선험적으로 제 형상을 노출하고 드러낸다. 설령 드러내지 않기를 의도하더라도 침묵의 빈자리는 ‘숨김’으로 표명되거나 때론 관념적 심상으로 자리바꿈한다. 애초 고립이 불가능하기에 작가는 더욱 관계를 파고들어 소외를 말하고 관계로부터의 배제를 시각화한다. 단절을 지향하는 작업일지라도 그것은 시선의 교환과 서로 간 관찰과 해석의 관계를 바탕으로 삼음으로써 완성된다.

관계의 고통, 고립의 키워드는 김남현 작가가 꾸준히 견지해온 작업 모티프다. 그는 관계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고립과 안위에 실패하며 사회의 기호를 입은 채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필연적인 속박을 체험하고 이를 시각화해왔다. 그의 작업에서 고립과 침잠은 이내 정신산란의 관계 위에 노출되고 균열을 보인다. 전시라는 채널 자체가 공론장 위에 노출되는 무대임을 감안할 때,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고립과 침잠 자체보다 그것이 실패하는 장면, 실패를 상연하는 장면에 가깝다. 침잠 불가능성은 외려 불가능성의 침잠으로 전환하여 작동한다.

그렇기에 그가 일관적으로 말하는 관계의 고통과 고립에만 집중할 경우, 관객은 오브제를 둘러싸고 교차하는 긴장을 읽기 어렵다. 외려 위의 키워드는 즉각적인 지각에 앞서 이를 설명하는 동시에 가로막는 베일이자 속임수 또는 우회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관념에 가깝다. 그가 성토하는 자기 분리는 이미 외부로부터 자기보위에 실패한 파편화된 비명에 가깝다. 이미 김남현의 작업에서 그가 말하는 고립과 고통이란 바깥으로 노출되고 타인의 시선에 분리되어 스스로에게 침잠하지 못한 채 절단되고 찢어지거나 다른 외피에 갇힌 모습으로만 대면할 수 있다. 설령 그가 작업을 통해 침잠하고 있다거나 작업이 관객에게 침잠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침잠 불가능에 대한 침잠일 것이고 자의식을 온전히 갖추기 어려움에 대한 의식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재의 전형성을 복기하여 독해를 차단하기보다 작가가 예의 딜레마를 어떻게 외화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작업에 대한 독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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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작업에서 김남현은 특정 장소와 집단성의 행위에 개인을 점착시켰다. 특정 장소의 기호를 포착하고 등신대 인물에 맞춰 도안한 <싱글(Single)>(2006-2010) 연작의 오브제는 마치 장소의 피부를 입은 개별 신체의 모습이었다. 대개의 장소는 병원과 병영, 학교, 수감시설과 같이 타인과 부대끼며 감시의 시선으로 포위하는 집단의 장소였다. 작가는 장소성의 기호를 등신대 인물로 압착하는가 하면, 장소에서 사용하는 장치와 몸을 하나로 밀착시킨다. 또는 <갇힌 자(Confined One)>(2006-2011)와 <장치(Equipment)>(2010) 시리즈의 프레임처럼 관계의 제스처를 형틀로 만들어 모델을 강제적으로 끼워 넣고 가둔다. 개인을 간섭하고 개입하며 구획하는 초자아적 공간, 파놉티콘적 공간으로서 장소성은 개인 경험을 기반 한 사회학적 관찰을 바탕으로 삼는다.

집단의 폐쇄성과 고립을 시각화한 작업은 이후 장소 특정적 스킨을 벗고 서서히 공간에 부대끼는 인물들 사이 관계의 교환과 교환이 초래하는 자기분리에 집중한다. <익숙한 충돌(familiar conflict)>(2012-2016) 연작에서 인물은 반듯하게 재현되었던 장소의 기호에서 탈구하여 제 몸과 살을 드러냄으로써 표현성을 강화한다. 특정 장소의 틀을 벗긴 몸은 분절되거나 분절된 채 덩어리진 모습이다. 온전한 주체성이 보장되기는커녕 타인의 간섭과 개입에 의해 벗겨지고 잘리고 녹아내린다. 친밀함이나 가족성 따위로 호명되곤 하는 신체의 유사성은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개인의 특수한 인격을 삭제하고, 부분신체들이 서로를 찌르고 섞고 밀착하며 한데 엉겨 붙은 모습으로 뭉개고 뭉쳐놓는 폭력성으로 역전된다. <마주한 내성(Cross Tolerance)>(2017)에서 풍선처럼 굴러다니는 얼굴에 뚫린 눈코입의 기능이란 특정 신체부위를 확인하기 위한 지표 내지 철심이 관통하는 구멍에 지나지 않다. 머리 형상은 특정 개인이나 주체를 상정하기보다 선과 선을 연결하기 위한 이음매로 전락한다. 이들은 시선에 관통당하고 으깨지는 동시에 제 시선과 발화로 상대를 관통하고 삼킨다. 예의 소통과 관계는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와 머리를 연결시키는 철심으로 시각화되면서 물성을 입고 리드미컬하게 형상화한 모습을 취한다.

작가는 ‘친밀함’으로 미화되는 간섭과 개입, 집단의 관계에 강제되는 동일성과 폭력성에 집중한다. 독립적 공간마저 확보하지 못한 관계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형상에 옮겨낸다. 표면에 맺힌 고통의 흔적들은 관객이 즉각적으로 마주하는 형상이자 관계가 관통하는 형상을 고통으로 감각하는 관객의 즉각적 반응이며, 동시에 관계의 속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촉매 장치이다.

고통 자체는 작가만의 경험일지 모른다. 하지만 형상은 고통 자체를 이미지로 남겨 다른 이들이 공감하고 제 고통의 정동으로부터 거리 둘 수 있도록 한다. 그 과정에 서로를 간섭하고 개입하는 피로와 체념, 냉소의 온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가 제 고통으로부터 확보한 거리를 통해 지각 가능하다. 예의 거리는 작가가 고통의 감각을 형상으로 옮겨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고통의 형상은 고통 자체의 감각을 전달할 뿐 아니라 형상을 매개로 심층에 있는 고통의 개념을 추상해낸다. 그것은 설령 기괴할지라도 소통의 폭력을 의식화함으로써 리듬으로 가공하고 시각화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표정 없는 이들, 또는 괴기영화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머리들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굴러다닌다. 홀로 설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을 관통하는 막대에 의해, 자신을 짓누르는 다른 머리에 기댐으로써 제대로 설 수 있다. 고통 속에서도 작가는 부분 신체들로 탑을 만들고 패턴을 구성하는 등의 재치를 보인다. 냉소의 거리를 견지하지만, 온전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자의식의 정신승리만으로 불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일까. 개별 오브제들은 상호 관통하고 교차함으로써 일어설 수 있다. 그는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개입당하고 관통 당함으로써 제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상징적 거세를 통해 주체가 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오랜 도식은, 주체가 되는 과정으로부터 잘려나간 얼굴들로 변형된다. 아니, 타인과의 접촉 자체가 마음을 깎고 얼굴의 형상을 패이게 하는 점에 작가가 형상화하는 관계는 상처 입은 공동의 얼굴, 의미화 과정의 잉여이고 잔여분이다.

형상들은 소외와 분리를 경험함으로써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상처’를 가리킨다. 관계로부터 탈구할 수 없는 답 없는 상황, 고착된 상황에서 작가는 냉소의 처세로 얼굴을 조형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냉소의 자리에서조차 자의식은 결국 홀로 자립할 수 없다. 설령 영혼의 일부를, 살점의 일부를 떼어낼지라도 뜯겨진 지점은 서로를 걸칠 수 있는 작은 홈으로 전환한다. 타인은 나에게 홈을 내고 갉아 들어온다. 제 형상을 보존하기 위한 작용과 반작용 사이의 긴장이 서로를 구조물로 지탱하고 직립하게 만든다. 적어도 작가가 가시화하는 고통은 이를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아니, 외려 작업이 보이는 것은 구속의 고통보다 고통을 감내한 생존의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최근 작업은 좀 더 피륙의 질감을 갖춘다. 머리가 녹아내리고, 오브제는 제작되었다기보다 질료로부터 오브제를 도륙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살점과 피를 연상시키는 질료들이 뒤섞여 전시장 여기저기 배치된다. 흡사 고통 자체를 현시하기 위한 표현의 강도를 높이는 것처럼 작업은 보다 노골적으로 물질성을 쏟아낸다.

여기서 물성만을 감각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오브제는 보다 피륙에 가까워진 반면 형태는 추상화한 점은 이전 작업과 변별된다. 이전 작업들이 부분대상의 신체파편 오브제를 다룬다면, 이제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형상화하는 시도로 나아가는 셈이다. 가령 최근 전시 <마주한 내성(Cross Tolerance)>(2018. 9. 4.- 21. 온그라운드) 에서 그는 파편화된 살점이 매달린 듯 한 그물을, 그물에 짓눌린 살점의 형상을, 핏빛 어린 프랙탈 구조를, 살점의 각을 뜬 것만 같은 주사위들을 선보인다. 직전의 작업들이 파편화된 육체로부터 관계를 조형해낸다면, 피륙의 속성이 보다 강화된 오브제는 관계의 조형 너머 추상의 규칙으로, 잔해들로 구성된 구조물로 도약하는 모습이다. 관념적 구조의 형상들은 초기 작업에서 매끈한 장소의 기호들에 가려졌던 속박된 이의 맨살을 과감하게 까뒤집었다 읽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작가는 초기 특정 장소성의 피부를 뒤집어 집단의 메커니즘을 발골해낸다. 이는 피부 심층의 살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그것이 향한 집단의 규칙을 추상화된 패턴으로 정리한 모습이다. 작가는 관계의 고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로부터 사회의 구조를 추상해내는 메커니즘은 희생제의를 통해 상징체계를 유지하고 거세를 통해 부권을 지속하는 일련의 추론들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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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현 작가는 고통의 형상들을 전시공간에 밀도 있게 배치함으로써 특정 오브제에 국한했던 제 키워드를 전시 공간 자체에 확장시켜 일종의 고립의 장소, 피륙을 드러낸 장소로 외화한다. 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작업은 동시에 관객에게 노출됨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 점에 작가는 아무리 제 상처의 형상들로 채워 넣을지라도 고통에 온전히 침잠하기보다 침잠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침잠마저 관객에게 노출되어 침잠에 실패함을 알린다.

고통을 전시한다는 측면에서 전시장은 일견 관계로부터 아픔을 전시하는 자의식의 함몰된 공간, 중2병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관계의 고통으로부터 변형된 신체를 전시하는 헤테로토피아로 부를 수 있다.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는 고통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고통이 하나의 기호로 소급되는 메타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그런 점에 그의 노골적인 표현은 물성 자체보다 우레탄과 레진, 페인트가 표현적으로 조합된 ‘유사-물성’(quasi-materiality)에 가깝다. 그렇다면 물성으로 둘러친 자의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평의 눈을 요청하는 바, 이는 유사-물성이 가리키는 베일 뒤의 지점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확보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고통을 전시하는 고통의 전술을 읽어야 한다. 고통을 대가로 시스템이 구축되고, 안정적인 삶의 패턴이 보장된다는 분석까지 다다라야 한다. 이는 작가가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고통을 통해 고통을 가로지르고자 하는 시도를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 텍스트에만 수차례 등장하는 고통의 ‘배경’은 무엇인가. 고통을 그러내는 방식은 전략적으로 기술되지만, 그의 작업에서 고통의 구체적인 배경과 맥락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은 외려 고통에 침잠하는 척 고통을 관념화하고 예의 구체성을 생략하는 것은 아닌가. 작업은 고통의 개별적 경험으로부터 고통을 양산하는 보편적 구조로 차원 전환한다. 작업은 보다 말초적인 물성과 추상적 형태의 극성을 한데 품고 있지만, 작가는 양극 사이 또는 전시 공간 바깥에 위치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현실의 수다한 상징기호와 관계의 적대와 협상, 긴장의 전술들, 관계의 배경을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작가는 피륙의 물성을 강화함으로써 이를 자의적으로 생략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이다. 물성과 구조 사이에 유통되는 기호와 고통의 맥락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구체적인 현실의 이야기가 될 것일진대, 그가 의도적으로 예의 맥락들을 지우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일까.

사회적 기호의 클리셰를 지운 작업은 육화된 추상적 오브제로 현현한다. 그의 작업은 관계가 고통의 근원임을 주장하기보다 유사 피륙을 통해 상징체계의 사회 바깥 경계면, 사회의 테두리를 메스로 절개하고 가리킨다. 절개된 경계의 잔여는 날카롭게 중심의 구조를 향한다. 그렇다면 그가 육화한 고통의 구조, 고통을 통해 길어 올린 구조의 형상은 어떤 언어들을 가지고 있는가. 고통의 기호는 어떤 변칙성을 구사하며 구조 속에서 처세와 전술의 방진을 치고 사회의 신체들을 새길 것인가.